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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고양이 마루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어둠의 저편/무라카미 하루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2005년)

독자는 소설가의 상상력에 대하여 어디까지 관대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늘 새로운 걸 원한다. 새로 나온 옷, 신발, 음식, 가전제품 등 모두 마찬가지다.   창작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이 주목을 받는다. 모든 작가들이 매번 같은 시점, 같은 배경(시간적, 공간적)을 설정하고 같은 나이, 성격의 주인공을 만들어 글을 쓴다면 과연 재미있을까? 또 아주 친숙한 사건(여주인공의 시한부 인생, 삼각관계, 권선징악, 출생의 비밀 등)들만 묶어서 갈등을 만들고 증폭시키면 독자들은 가만히 있을까? 물론 엔딩도 매번 해피엔딩이라고 한다면? 그건 죄악이다.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지만 드라마와 영화, 연극 같은 허구를 본다. 왜 그럴까?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보고 감정이입을 해서 울고, 웃고 안타까워하며 또 답답해하며 욕까지 하기도 한다. 가장 악랄하게 나쁜 짓을 한 놈이 결말에서 능지처참 같은 극형으로 죽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바로 문학과 삶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학은 인간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다. 또 동시에 허구라는 아주 강력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허구가 실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주 논리적으로 만들어 독자들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허구의 범위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소설 이론에 따르면 <개연성>이 가장 기본이 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번에 읽은 하루키의 소설 <어둠의 저편>은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닌 것 같다. 과연 이런 일이 소설이지만 가능할까? 허구와 상상력의 세계라는 걸 감안해도 문제의 부분을 수용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위의 언급한 문장들을 보면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인 작가에게 무슨 실례냐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또 이 필자는 문학적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무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필자의 생각을 말하자면 이 소설은 내 친구들에게 그리 권하고 싶지 않은 소설이다. 물론 재미는 있다. 곳곳에서 하루키의 장점이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시간은 단 이틀. 더 정확히 말하면 오후 11시 56분에서 시작해서 다음날 오전 6시 52분까지의 기록이다. 아니다 틀렸다. 6시 52분 후에 일어난 행동들도 서술하고 있으니 그 이후의 기록까지라고 해야 맞겠다. 대충 계산하면 불과 7시간에 일어난 일들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문제는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시점이다. 물론 시점도 소설 안의 한 부분이지만 이 소설의 시점은 특이하다. 소설을 이루는 개연성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아사이 에리의 방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렇다. 현실과 가상이 같이 존재하는 곳. 그 안에 있는 텔레비전이 연결통로가 되고 의문의 인물이 등장하고 사라지고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과연 작가 하루키의 의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해답은 쉽게 나올 수 없기에 아둔한 필자로서는 당장은 미뤄야 겠다. 

 

 

<마리는 미운 오리새끼가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바로 <아사이 에리>와 그녀의 동생 <아사이 마리>의 이야기이다. 탁구공이 랠리하는 것처럼 마리와 에리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이어지고 있다.

 먼저 동생이야기를 해보자. 마리는 가을의 끝자락 늦은 밤 혼자 도시의 유흥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겨우 대학 1학년인 열아홉이다. <데니스>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며 두꺼운 책을 읽고 있다. 마리는 책을 읽고 있지만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 장소에 다카하시가 우연히 들어온다. 이 다카하시는 바로 마리의 언니인 아사이 에리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하지만 고교 동창인 둘은 그리 친하지 않다. 다카하시는 그리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 반면 에리는 중학교 시절부터 잡지표지 모델을 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2년 전 어느 수영장에서 에리와 에리의 남자친구 또 다카하시와 마리(당시 고등학교 2학년), 이렇게 넷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언니도 예쁘지만 동생 마리의 외모도 그리 나쁘지 않다.(카오루와 다카하시 등 모두 마리에게 예쁘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예쁜 얼굴을 몰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워낙 언니가 뛰어난 미인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난 둘은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다카하시는 대학생 3학년(이건 필자의 추측)이며 근처 빌딩 지하 연습실에서 악기를 연주한다. 밴드의 한 멤버인 그는 트롬본을 연주한다. 아쉽게도 오늘 밤이 그의 마지막 연주가 될 것이라고 한다. 다카하시는 밥을 먹고 둘은 그동안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다카하시는 식사를 끝내고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고 자리를 뜬다. 이후에 알파빌 러브호텔 지배인이 마리를 찾아온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 그녀는 바로 <카오루>, 전직 여자 프로레슬러였다. 카오루는 중국어 통역을 부탁하고 마리는 승낙한다. 둘은 레스토랑을 나가고 나이 어린 중국인을 도와준다. 한 남자가 일파빌에 들어와 성관계를 하기 위해 여자를 불렀는데 뜻하지 않게 생리가 시작되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시와가라>이며 혼자 사무실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손보고 있었다. 시와가라는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자 <궈돈리(중국인 피해 여성)>를 폭행하고 가지고 있는 걸 전부 빼앗는다. 속옷까지 전부 가져갔다. 이 남자는 샐러리맨이고 집에 부인도 있는 남자다. 아이가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카오루의 노력으로 카메라에 찍힌 시와가라의 얼굴을 알아냈고 그 지역에서 매춘을 관리하는 중국인 조직원에게 넘겼다.

 

 마리는 카오루와 헤어지고 <스카이락>이란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의 점장은 카오루와 친분이 있다. 다시 다카하시가 마리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온다. 카오루가 다카하시에게 지금 마리는 그곳에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둘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말이 없는 마리이기에 다카하시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음악은 그만두고 법률에 관련된 일을 공부하겠다고 한다. 음악은 좋아하지만 밥을 먹고 살 수 없기에, 또 이번 4월과 6월에 재판소에 가서 무언가를 느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죄인이라고 해도 법이나 제도에 따른 공권력의 힘은 엄청나게 대단하다는 것이다. 다카하시는 깊은 해저에 사는 문어를 가지고 예를 들었다. 또한 자신도 언제든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은 스카이락을 나오고 산책을 한다. 마리는 카오루에게 듣지 못한 대답을 다카하시에게 요구했다. 다카하시는 과거에 알파빌에서 한 여성과 관계를 가졌고 나중에 계산할 때 돈이 모자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학생증을 맡겼고 다음날 돈을 가지고 학생증을 찾으러 갈 때 카오루에게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고 그렇게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은 이 소설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호감을 느낀다.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같이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마리는 다음 주에 중국으로 교환학생 자격으로 떠난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주 긴 편지를 쓰겠다고 하며 헤어진다. 마리의 이야기는 큰 문제점이 없다. 그냥 소설이다. 그것도 하루키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소설이다.

 

<완벽한 백설공주가 되는 과정>

 

 그렇다면 이제 다른 이야기 아사이 에리의 부분을 살펴보자. 이 부분은 여러 번 읽어야 했다. 쉽게 읽을 수도 없고 이론 책을 펼쳐가며 읽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이 어렵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대충 넘길 수는 없다. 물론 전체를 다 분석해서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부분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접근했다.

 

 언니 에리는 이제 앞으로 잠을 자겠다고 가족들에게 통보하고 두 달이 넘도록 잠을 자고 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우선 잡지나 방송출연 및 광고 일이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약을 너무 많이 먹어 정신의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만사가 귀찮아서 그냥 휴식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무게를 두고 살펴봐야 하는 것은 에리의 방에 있는 시선이다. 이 방에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하고 그 연결점이 바로 텔레비전이다. 분명 텔레비전의 코드는 빠져있다. 그렇다면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하루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텔레비전이 현실과 가상을 연결해주는 도구로 설정했다. 잠든 에리를 살펴보는 다른 존재가 존재한다. 바로 <얼굴 없는 남자>다. 이 남자가 누군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잠든 에리를 가만히 바라만 본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 혹은 가면. 독자들은 이 남자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또 이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에리는 자신의 방에 있는 텔레비전 안에서도 잠들어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소설에는 그렇게 보여진다. 그리고 뒤에 가면 에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움직인다. 또 자신의 방이 아닌 걸 알고 소리도 지르고 유리를 주먹으로 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에리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잠들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 원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되돌아 갈 수 없었다. 텔레비전 안에는 그 가상의 세계가 무너지고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 무질서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에리는 어디로 갔을까? 알 수 없지만 소설 후반에 다시 자신의 방에 돌아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리 이야기를 하루키가 어떤 의도로 서술했는지 알 수 없다. <어둠의 저편>을 발행한 출판사에 전화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하루키에게 전화를 걸어 또는 메일을 보내 물어볼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책을 읽고 살펴보자.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계속 잠만 자겠다고 한 것은 에리 자신이라는 점과 약을 너무 많이, 그것도 지나치게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 텔레비전은 왜 현실에 존재하면서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그 가상의 세계는 아사이에리의 <무의식의 세계>가 아닐까? 에리의 꿈을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는 것일까? 이렇게 본다면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 자세히 파고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몇 번이나 읽고 이 글을 완성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는 이해할 수 있는 머리도 아니다. 인과관계를 떠나 작가 하루키의 새로운 시도라 고만 정의 내리는 것도 하나의 가능성 일 것이다. 하지만 그 새로운 시도가 과연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이 소설에서 그렇게 비중이 있었는지? 또 소설의 전개 방식에서 꼭 필요했는지? 이런 질문들이 가득 차게 되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마지막 문장을 다 읽어도 남는 것이 의문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굳이 왜? 이런 방식으로 에리 사건의 축을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시간이 더 지나 이 소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지만 일단은 여기서 멈추기로 하겠다.

<살짝살짝 스치고, 검은 천막에 보이는 실루엣>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도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각 사건의 연결을 이어주는 하나의 가능성을 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필이다. 에리가 가상세계에서 주운 <veritech>라고 써 있는 지우개 달린 연필이다. 어쩌면 그 얼굴 없는 남자는 <시와 가라>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작업한 사무실에서 시와 가라가 그 연필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카하시와 시라가와는 같은 편의점에 있다가 나온다. 저지방의 우유 그 도구의 역할을 한다. 또 휴대폰도 그 편의점에서 각 인물들을 이어주는 비중 있는 도구로 보인다. 알파빌의 텔레비전과 시와가라의 집에서 같이 방영된 <심해의 동물들>이란 프로도 그것이다. 같은 시간에 공간은 다르지만 같은 프로를 보며 묘하게 이어진다. 하루키는 이러한 점을 의도적을 곳곳에 배치한 것 같다. 소설 <어둠의 저편>은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소설이고 여기저기서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소설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여전히 궁금한 점이 많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꽤 지나 이 소설을 다시 읽을 것이다. 그때라도 많은 부분들이 풀어지면 좋겠다. 물론 공짜는 없다. 다양한 글들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는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이렇게 단문을 많이 썼을까 저도 의문이네요. 전체적으로 이해를 못해서 부분만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아둔해서요. ㅋㅋ 또 이 소설에 나오는 음악을 가지고 언급을 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니 아주 치명적이네요. ㅜㅜ 제 부족함을 다시 느낍니다. 

 

마루가 이제 집에 왔어요. 두 달 반만에 부자가 상봉했어요. ㅜㅜ 다시 만나니 캣타워에서 내려와 같이 자주더군요.(딱 하루만) ㅋㅋ 대박, 이렇게 예쁜 아가입니다. 이웃님들 모두 맛난 거 드시고 행복하시고요. 늘 건강하세요~~ 글쓰기에 욕심이 생겨 자꾸 지우기만 합니다. ㅜㅜ 다시 처음부터 마루에게 배워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