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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고양이 마루

상실, 그 이후에 오는 것들

 

 이 책을 이제야 읽었다. 2017년 여름. 푹염주의보가 여러 번 발령된 여름이었고 마음과 몸이 불편한 시기였다. 하지만 몸이 불편했기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이 소설을 읽는 게 가능했다.

 이 소설의 중심 소재는 죽음과 사랑이다. 바로 주인공과 가까이 있는 인물들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또 남겨진 사람들은 죽은 이와 관련 있는 존재이면서 같은 상처를 간직하면서 서로 사랑에 빠진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이 다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인물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 먼저 죽음을 본다면 사고가 아닌 자살이다. 어쩌면 죽음은 간단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떠난 자들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렇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간단하지도 않고,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기즈키의 자살 원인을 알 수 없다. 남겨진 연인과 친구는 기즈키를 빼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둘의 재회는 우연이었지만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와타나베는 아픈 나오코를 걱정하고 기다리며 희망적인 미래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나오코는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그 때 그의 곁에 미도리가 있어 다행이었다. 만약 후배인 미도리라도 없었으면 그의 방황은 계속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만나며 사랑을 하고 때론 상처를 남기며 살아간다. 시간이 지나도 아픈 상처는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고 치료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 뒤에 다시 다른 사람을 만나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한 발씩 나아간다. 시간의흐림에 역행할 수 없는 존재들. 바로 그 안에 모든 걸 담으며 살아간다.     

 

 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바로 와타나베이다. 이 남자주인공은 명석하고 다정하다. 음악(고전)을 듣는 걸 좋아하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밝히고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며 솔직하게 말을 한다. 물론 상대방이 귀찮게 나올 것 같으면 미리 상황을 파악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같은 대학의 동성 친구들과 선후배들과의 관계를 끈끈하게 유지시키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나가사와의 관계는 예외다. 이 와타나베는 선배 나가사와를 만나면서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고등학교 동창이자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처럼 주위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도 있고 리더십도 있으며 유머도 있다. 또한 똑똑하고 화술도 뛰어나지만 나가사와가 더 많은 부분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판단한다. 나가사와는 강하고 독단적이며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다. 좋은 집안 출신이며 졸업 후 아무런 탈 없이 자신이 설계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갈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닮은 부분도 있지만 여성을 대하는 부분에서는 다르다. 그것이 바로 나가사와의 연인 하쓰미를 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서 와타나베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인 나오코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감싸 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많은 시간 동안을 기다리기도 한다. 또한 자신을 좋아해 주는 미도리에게도 많은 부분을 배려해준다. 하지만 나가사와에게는 그런 부분을 찾기 힘들다. 먼 훗날 나가사와는 독일에서 와타나베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바로 그 내용은 하쓰미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가사와는 후회하고 가슴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와타나베는 바로 그 편지를 찢고 던져버린다. 그리고 나가사와에게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너무 늦게 깨달은 나가사아에게 분노를 느끼고 자살한 하쓰미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뒤석인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예쁜 고양이 삼색이~

와타나베의 묘한 끌림, 그것은 대나무 숲

 

 작가 하루키가 이 소설을 전개시키는 방법은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주인공 와타나베의 열일곱에서 스무 살이 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다보니 실제 인물들이 서로 대화하고 감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과 상처, 혹은 악몽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와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끌어안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구원의 첫걸음일 것이다. 물론 치유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오코는 결국 와타나베의 꿈처럼 같이 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낸 편지의 내용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 초반에 나는 나오코가 잠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와타나베와 교제를 이어갈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혼자만의 동굴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 안에서 죽은 언니와 과거 연인이었던 가즈키가 부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난 그녀의 죽음은 예상하지 못했다. 모르겠다. 난 와타나베도 레이코도 아니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 나오코도 아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자신에게 남긴 꽃다운 삶을 날카롭고 서늘했던 줄에 자신의 목을 메달아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와타나베가 아미료를 나가 같이 살자고 했던 그 제안이 죽음만큼 강압적으로 억누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불완전한 한 인간이라고 했다. 사실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그 착각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 나오코는 자신의 병을 극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와타나베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란 것 같다. 하지만 환청이 들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편지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이 아픈 그녀를 더 힘들게 하고 끝내 자살까지 하게 만들었을까?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와타나베이다. 그가 주인공이기에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와타나베는 타인의 마음을 여는 방법을 알고 그 또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그의 연인인 나오코가 요양 중에 만난 레이코 여사는 바로 첫 만남에서 그걸 느낀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공통점은 곁에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 연인의 죽음, 친한 친구의 죽음. 아니면 자살을 시도하거나 과거에 죽을 만큼 큰 고통에 빠져 아직도 상처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은 레이코 여사의 과거다. 이런 경험은 절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성 정체성은 물론 한 여인의 자존감과 가정을 파괴하려고 했었던 행위다. 하지만 천사의 가면을 쓴 열세살 악녀(레이코 여사의 제자)의 입술과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던 레이코 여사의 몸. 그 몸 안에 자신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고 또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본능이었다. 물론 레이코 여사는 부정했고 그걸 증명해 보였다. 나오코와 관계에서도 또 마지막으로 와타나베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본다면 한 인간과 한 인간이 만나 정을 나누고 서로의 모습이 조금씩 닮아가고 감당할 수 없는 고민을 나누고 위로받고 하는 행위가 꼭 필요한 모습일 것이다. 그게 동성과 이성으로 꼭 나눌 수 없고 나누는 것도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그럼 그러한 관계에서 육체적인 관계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소설에서 연인들이 나누는 사랑의 절정 혹은 종착은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가 아니다.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후 인물의 심리상태는 변한다. 가즈키가 죽고 여자와 처음으로 관계를 나눈 와타나베는 무책임하게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일반적인 이별을 통보한다. 아니 그녀에게서 도망가고 더 나아가 고향에서 달아난다. 친한 친구의 죽음에서 죄책감이나 그 보다 더 무거운 감정을 느낀 것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와타나베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우연은 그녀, 바로 나오코를 만나게 했다. 어쩌면 둘은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오코는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도 하고 또 다른 사랑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 소설은 달라졌을 것이다. 와타나베에게 상실의 의미를 가장 크게 알려주는 인물은 바로 나오코밖에 없다. 단순히 나오코가 아닌 가즈키의 죽음도 상기시킬 것이다. 친구과 연인을 둘 다 잃어버린 스무 살의 청년에게 더 큰 시련이 또 있을까?

 

 소설 중반으로 들어가면 와타나베에게는 나오코만큼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 감정을 모르고 부정했는지 모르지만 역시 상실, 그리고 결핍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상대의 부재를 통해 누구보다 절실히 상대를 원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는 바로 미도리다. 그리고 나오코와 관계를 정확하게 하기 위해 기다려 달라고 한다. 와타나베는 갑자스럽게 나오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와타나베는 기숙사를 나와 자신이 지낼 수 있는 안식처를 구하게 된다. 그 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던 중에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오코의 죽음 그 후에 떠나는 여행. 아니 상처를 감당할 수 없어 길을 나서는 도피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탈출인 것이다. 더 자세히 와타나베의 속을 들여다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안에는 이 주인공이 짧은 인생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기억이 아닌 것이다. 즉 평범한 기억이 아닌 것이다. 혼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다시 누군가와 이뤄야 하는 사랑이 있었고 같은 상처를 나누고 같은 온도의 눈물을 흘려주었던 사람이 있기에 와타나베는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죽은 자들이 자신이 망가지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나눈 사람은 바로 레이코다 이 문단에서는 여사라는 호칭은 쓰지 않을 것이다. 매력이 넘치는 그녀에게 여사라는 호칭은 실례일 수도 있다. 레이코는 나이를 떠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다. 그녀는 모성애가 강하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아껴준다는 걸 이 소설책을 덮고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충분히. 레이코는 죽은 나오코의 옷을 입고 와타나베에게 왔다. 쓸쓸한 장레식을 위로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곡을 연주한다. 그리고 연주해 준다. 나오코에게. 두 사람만의 방식으로 다른 세상으로 멀리 떠난 나오코를 다시 떠나보낸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고 둘은 같은 육체를 나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단순히 쾌락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하루키가 마지막에 어떤 의미로 둘의 관계를 그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소설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다. 다양한 독자들이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소설은 수학공식으로 답을 찾아낼 수도 없고 독자들의 상상력이 더 다양하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죽음은 와타나베의 탓이 아니다. 그러니 더 이상 자신을 상하게 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희망을 나누라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단순히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편지에 쓴 것도 아니다. 나를 대신해 아픈 나오코를 돌봐줘서 고맙다는 것과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에게 진심 어린 충고와 걱정을 해줘서 고맙다는 등 여러 가지 속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와타나베와 레이코. 레이코와 와타나베 이 둘은 단순히 친구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편히 털어놓을 수 없는 상처까지 공유했다. 그것은 평범한 신뢰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 두 사람이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1989년에 소개된 이 소설은 분명 독자들이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힘을 가진 소설이다. 각 인물이 가진 경험. 때로는 흥미로웠고 의아하기도 했으면 아쉽기도 했다. 속으로 와타나베 당장 나오코에게 달려가.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깊게 빠져들어 안타까움도 느끼게 했다. 전체적으로 충분히 공감을 이끌어냈다.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이가 있다면 당장 내 가방에 있는 책을 빌려줄 용의가 있다. 물론 돌려받지 못해도 상관없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1989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니 그냥, 참고만 하셨으면 합니다.